소셜리뷰

혼자 온 남자들

디마드 2025. 12. 2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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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부할 수 없는 유혹 앞에 나는 종종 소월아트홀을 찾는다. 명색이 중년의 가장인데, 이쯤 되면 가족들과 화목하게 앞줄을 채워야 그림이 살겠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아내와 자식들에게 공연 보러 가자고 제안해 봤자 돌아오는 건 "졸려", "학원 가야 해", "당신이나 다녀와" 같은 미지근한 대답뿐이다. 결국 나는 오늘도 당당하게, 사실은 조금 익숙하게 혼자 티켓을 끊는다.


​공연장에 들어서면 묘한 동질감이 느껴진다. 나처럼 혼자 앉아 프로그램 북을 뒤적이는 남자들. 우리는 서로를 안다. 예술에 미친 광인이라기보다, 단지 집구석의 소음에서 벗어나 고상하게 고립되고 싶은 가장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쭈뼛거리지 않는다. 여긴 우리들의 해방구니까.

​이번 공연은 '유럽 여행 콘서트'였다. 평소 좋아하던 음악감독이 쇼팽의 왈츠를 연주한다기에 기대가 컸다. 내 자리는 3층 오른쪽 가장자리. 남의 눈에 잘 띄지  않으려는 본능이 고른 명당이다. 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길, 옆옆 자리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어...?"
"아! 안녕하세요."


​몇 년 전 수영 레슨을 같이 받았던 아저씨다. 50대 중반, 당시엔 붙임성 좋은 아내분과 늘 찰떡처럼 붙어 다녀서 우리 사이에서 '잉꼬부부'로 통했던 분이다. 내심 반가웠다. '이 형님도 나처럼 가족들 떼어놓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러 왔구나' 싶어 동지애마저 느껴졌다.

"오랜만이네요! 어째 혼자 오셨어요? 형수님은 어디 가시고."

가벼운 농담조로 던진 말이었다. 같은 처지라는 걸 확인받고 싶은 중년 남자의 너스레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웬걸, 아저씨의 표정이 순식간에 진흙탕처럼 어두워졌다.

'아차, 뭔가 잘못됐다.'

본능적으로 입을 닫았다. 아저씨는 뭐라고 대충 얼버무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공연이 시작됐지만 내 마음은 이미 유럽이 아니라 미궁 속을 헤매고 있었다.
​무대 위에는 유럽의 풍광이 흐르고 화려한 선율이 쏟아졌다. 분명 황홀한 공연이었는데, 이상하게 자꾸 옆자리 아저씨의 옆모습에 눈이 갔다. 공연이 끝나고 짧은 인사라도 건네려 했지만, 그는 커튼콜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둠 속으로 증발해 버렸다. 마치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을 들고 도망치듯.

​찝찝한 마음을 안고 집에 돌아와 페이스북을 열었다. 예전 수영장 모임의 흔적을 따라 들어간 그의 타임라인. 온통 음식 사진과 아이 이야기뿐, 그 밝던 아내의 모습만 어디론가 실종되어 있었다. 그러다 발견한 게시물 하나.

​[한 부모 가정 대상, 문화 공연 관람 지원]
​심장이 툭 떨어졌다. 구청에서 지원하는 한 부모 가정 시스템. 금슬 좋던 그 부부에게 '이혼'은 가당치 않았고, 결국 남은 단어는 하나뿐이었다. 사별.
​갑자기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나는 가족들이 공연을 귀찮아한다는 배부른 투정이나 부리며 이곳에 갔는데, 그 아저씨는 사라진 아내의 빈자리를 채우려, 혹은 견디려 그곳에 앉아 있었던 거다. 같은 '혼자'였지만, 나의 고독은 취미였고 그의 고독은 생존이었다.

​인생 참 쓰다. 피할 수 없는 이별이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찾아온다는 사실이, 그리고 남겨진 이는 어떻게든 꾸역꾸역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가슴을 짓눌렀다.
​거실 너머로 자고 있는 아내와 아이들의 숨소리가 들린다. 평소엔 그렇게 귀찮던 그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귀하게 들린다. 쇼팽의 왈츠는 경쾌했는데, 내 마음속엔 여전히 낮은 저음의 단조만 울려 퍼지고 있었다.